감각의 경계, 각자의 정원
 < 각자의 정원 > 작가 퍼포먼스를 보는 시선
 

김현명 (매체/비평)
 

그날 정원의 날씨는 변화무쌍했다. 잠깐 비치는 햇살에 기대 섞인 희망이 스치기도 했지만, 오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는 쉽게 멈출 기세가 아니다. 며칠 전, 도모헌에서 열리는 ‘각자의 정원’ 작가 퍼포먼스와 작가와의 대화 행사에 모더레이터로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마침 그 자리에 나서려던 참이었다. 행사 당일의 날씨는 그런 종류의 행사를 개최하기에 썩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도모헌이라는 장소는 원래 부산시장의 관사로 사용되다가 리뉴얼된 후, 2024년 일반 시민들에게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 한 곳이다. 그 장소 자체도 처음이기도 했고 비교적 젊고 매체의 배경도 다양한 작가들의 퍼포먼스라는 표현 방식에 대해서 왠지 오래된 익숙함과 낯선 생경함을 동시에 함께 불러일으키게 했다.
 
‘각자의 정원’이라는 퍼포먼스는 1년 전 복합문화공간 헬멧에서 ‘각자의 개변’이라는 전시를 연 이후, 일종의 후속 전시나 보고서인 성격의 행사인 셈이다. 단발성의 전시와 행사가 수없이 열리는 문화계이지만 작가들이 이를 이어가며 지속적인 과정이나 사유들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열린 만남들은 흔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나에게는 여전히 낯선 형식인 ‘작가 퍼포먼스’도, 사전에 배경지식이 전혀 없던 참여 작가들도, 모두 당일 모더레이터로서의 역할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막막하게 느껴지게 만든 요소들이었다.
 
다행히, 내가 막 도착한 2시 30분경 오전 내내 정원에 뿌리던 비는 잦아들었다. 기묘하게도 자연은 그렇게 축복처럼 때때로 우리에게 자리를 내어 준다. 비가 그친 그날의 초록빛의 빈 여백이 그날 < 도모헌 >을 방문한 구경꾼이었던 우리 모두에겐 ‘정원’이 되었다. 퍼포먼스는 정확히 3시부터 1시간 30분 동안 진행되었다. 아무런 배경과 익숙함이 없었던 그런 시간들은 우리에게 우연과 공감이 뒤 섞인 ‘만남’이라는 선물을 선사해 준다. 오히려 그 낯섬이야 말로 그날 그 공간에서의 진정한 주인공이 되어 주었다.
  
두 사운드 아티스트의 음향이 도모헌 정원 위로 흘러 나오며 작가들의 퍼포먼스는 시작되었다. TAERI KIM선진은 전자음악 DJ이자 사운드 아티스트이다. 이 두 사람의 음향은 퍼포먼스 시간 내내 정원에 음향과 자연의 깊이 있는 울림들을 전달해 주었다. 태리 킴은 자연의 흐름과 아름다운 깊이감 속의 모호한 영역에 존재하는 소리와 이미지의 특징들을 사운드로 표현하는 아티스트이다. EDM과 테크노, 실험적 사운드를 폭넓게 아우르는 평소 스펙트럼과는 달리 완전한 자연 공간 위로 흐름이 있는 자연음향과 새소리를 연출하여 공간과 사운드의 교차지점을 뒤섞는 음향연출을 시도했다. 우리가 공간을 생각할 때 단지 깊이를 떠올릴 때가 많다. 그렇지만 소리가 울려 퍼질 때 공간 위로 시간이 드리워지는 것을 깨닫는다. 정원에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색채와 움직임 위로 ‘시간’이라는 비가시적 조건이 드리워지고, 그 속에서 소리가 파동처럼 퍼져나가며 공간에 깊이를 더했다.
 
선진은 무의식적인 소리의 상태를 한국적 감성과 음향으로 풀어나가는 아티스트로 알려져 있는데, 이날 자연 위로 내내 관객들을 자극하는 사색적 사운드스케이프는 단순히 듣는 것을 넘어, 공간에 머무는 이들의 감각을 자극하며 무의식 깊숙한 곳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사운드 퍼포먼스는 미술적인 표현 영역에서 색다른 다채로움과 한편 쏟아지는 비트나 팝의 커다란 흐름 속에서 변별력을 전달하기에 실패할 위험도 동시에 지닌 매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날 태리 킴선진은 정원의 여백과 자연성에 기반해 절제와 감각의 균형을 훌륭히 유지하며, 공감각적 울림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무엇보다 이들의 작업이 환기시킨 것은 공간이란 본래 울림을 내포한 장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울림은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의식과 무의식, 이미지와 소리 사이의 긴장과 교차 속에서 발생한다. 이날의 정원은 단지 형체의 운동으로만 채워진 장소가 아니었다. 마음속으로 흘러가는 소리와 풍경, 그리고 그 감각의 공명이 함께 어우러지며 만들어낸 ‘정서적 정원’이자 ‘감각의 장’이었다. 두 사운드 아티스트의 사운드는 공간이라는 조건들 속에서 소리라는 비물질적 매체가 어떻게 하나의 장소를 기억, 정서, 시간, 풍경으로 변모시키는 캔버스가 될 수 있는지를 인상적으로 남겨 주었다.
 
손한울 작가는 텍스트로 뒤덮인 의자로 고정시킨 기다란 천 위로 한 시간 반 내내 ‘사랑해’ - 라는 글자를 써 내려갔다. 처음 40분이 지났을 때만 해도, 그는 아직 천의 반도 채우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나는 이 작업이 완결보다는 과정에 머무는 퍼포먼스일 것이라 짐작했다. 그러나 정확히 1시간 30분이 되자 작가는 빈틈없이 ‘사랑해’라는 글자로 천을 빽빽이 채운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진성성’이라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긴 한데, 한 시간 반 동안 땀방울을 천위에 뚝뚝 흘리며 자세한 번 고치지 않고 새겨 놓은 작가의 ‘사랑한다’는 그 고백에는 무엇이 눌러 담겼을까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작가 토크 시간에 작가가 ‘일종의 반성문과 같다’ - 는 말이 나의 뇌리에 쏙 들어온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뱉는 말들, 그 속에 따라 달려오는 통속적인 어감이나 자기 현시들을 그 시간 동안 일종의 고행의 행위를 통해 반성한다는 뜻이었을까? 작가는 사물을 지시하는 단어나 (의자의 표면 위를 작가 스스로 빽빽하게 글자로 뒤덮었던 것처럼) 이를 기반으로 하는 행위 모두를 반성하고 싶어 한다. 나는 작가의 그 행위 자체가 지닌 무목적성이 오히려 우리가 지시하는 언어의 배반들을 가시화하고 게임, 투쟁, 자기 현시로 변한 본질에 관한 - 행위의 진정성을 더욱 돋보이게 해 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마도 한 시간 반 동안 사진이나 정보가 아니라, 그를 함께 지켜본 사람들만의 공감대라는 점에서 작가의 연극적 시간에 가장 투철한 환기를 심어준 퍼포먼스였다. 그는 ‘사랑한다’는 말을 다시 쓰기 위해, 먼저 말을 의심했다. 그 반성적 행위 속에서 비로소 언어는 다시 살아났다.
 
한 시간 반동안 진행된 행사에서 나타나지 않은 작가가 있었다. 김등용 작가는 부재의 퍼포먼스를 제안해 주었다. 단지 나타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온라인을 통해 자신의 시점을 분명히 표명하고, 개입하고, 관찰했다. 작가의 관점은 현장에 설치된 모니터를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 화면은 스마트폰 라이브로 함께 관찰하고자 하는 관객들에게 그대로 전송된다. 보이지 않는 작가의 시선은 그렇게 정원으로 접속했다. 김등용 작가는 자신이 관찰하는 도모헌 정원 주변부를 관객들과 함께 세밀하게 관찰하며 신중하게 흔적을 남긴다. 미시적인 자연의 작은 조각들은 나무의 표면에, 돌 위에, 벤치의 바닥면에 세밀한 자신 만의 표식으로 남겨진다. 자연의 작은 조각들이 그의 주의 아래 하나의 좌표가 되고, 그 좌표는 화면과 현장을 가로질러 중첩된다. 작가의 행위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그만 흔적을 남김으로써 모두의 정원 속에서 다차원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의 행위에는, 낯설고 불편한 행위의 강박을 미술적으로 끌어 모으고 패턴과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버려진 것들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는 관점을 제시한다. 우리의 성격이나 정체성은 어떤 질서를 따르고 있는가? 잘 배열된 로직은 사실상 나를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김등용 작가는 바로 이 지점을 건드려 준다. 쓸모없이 버려지는 순간이나 신체의 부산물, 자연의 미세한 조각들을 자신의 방식대로 점진적인 형체로 발전시키는 일견 강박적으로 보일 정도의 신중함으로 모으고 재배치하는 행위를 통해 작가는 우리 자신의 고유한 성격, 실존적으로 내가 존재에 응답하는 방식을 환기시키는 듯하다. 동시에 그는 관찰과 흔적 남기기를 화면 플랫폼 위로 확장한다. 이러한 저자의 관찰들을 온라인과 오프라인에 동시에 전개시키며 선택한 김등용 작가의 기술적 프로세스는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다. 김등용의 작업은 그 장을 가볍게 비틀어, 우리가 무엇을 보고 어떻게 남기며 어떤 질서로 스스로를 설명하는지 되묻게 한다. 그래서 그의 부재는, 이상하게도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한 현존으로 기억된다.
 
정원에 거울이 드문드문 보였을 때, 꽤 흥미로운 장식적인 풍경을 선사해 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참여자들에게 거울 위로 그림을 유도하며 낙서에 가까운 추상적인 행위들을 유도해 내었을 때는, 그림이라는 행위에 숨은 - ‘재현’이라는 오래된 주제를 조용히 호출하는 장치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김은지 작가는 그간 설치미술과 매체를 통해 인간이 형상과 세계를 인지하는 과정을 다각도로 탐색해 왔다. 이날 퍼포먼스에는 정원 주변에 드문드문 배치된 거울을 통해 우선 관객들은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었고 그 표면 위로 작가가 준비한 물감과 펜으로 직접 드로잉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비정형의 거울 위로 비치는 스스로의 모습들과 그림들이 움직여 가며 서로를 덧칠해 가는 모습들은 흥미로운 변화를 선사해 주었다. 김은지 작가는 이 거울들을 오가며 다시 작가의 터치로 시간과 행위들이 겹쳐진 그림들을 완성해 내었다.
 
여기서 거울은 단순한 반사판이 아니다. 거울에는 정원으로 확장된 공간이 담겨 있지만 한편 참여자들의 내면도 아울러 내는 경계의 그림자로써 그림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었다. 김은지 작가의 정원은 자유롭고 개방적이지만 작가의 주관도 확고하게 드러나는 그림에 관한 관점이 도사리고 있다. 반사와 덧칠, 지우기와 다시 쓰기의 과정을 통해, 추상과 재현은 서로의 영역을 침투한다. 우리가 인지하는 외부세계, 즉 정원이라는 공간에는 매체를 통해 재현된 이미지가 담김으로써 그것은 누구에게나 형상이라는 인지적인 의미로 변한다. 우리는 그것을 마음속에 그려진 그림이라고 부를 수 있다. 마찬가지로 거울처럼 내면과 대화하는 정원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김은지 작가가 제시하는 정원이란 ‘어떻게 인지하고 관계했는가’에 대한 기록, 즉 관객과 작가가 공동으로 제작한 지각의 지도에 가깝다.
 
이날 5명의 의욕에 넘친 작가들의 (좋은 의미로서의) 순진한 열정을 마주한 것은 개인적으로도 인상 깊은 만남이었다. 우연하게 그날의 ‘각자의 정원’을 마주한 관람객들에게도 무척이나 새로운 만남들을 선사해 주었다는 생각이다. 그날 도모헌의 정원은 이들의 퍼포먼스와 사유들이 경계를 횡단하는 장소로서 꽤 울림이 있는 공간이 되어 주었다. 퍼포먼스라는 용어에 함의된 ‘아방가르드’라는 것이 현재에도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 것인가? 나는 최근에 이어지는 미술용어나 각종 강연 형식에 조금 지루해하던 차였다. 그런데도 이들이 이 날 나에게 선사해 주었던 작업은 바로 현장에서만 가능한 ‘일상성’과 ‘장소성’ 바로 그 자체의 에너지로 다가왔다. 도모헌이라는 정원은 그러한 감각의 교차들을 돋보이게 하는 그릇이고 플랫폼이 되어 주었다. 퍼포먼스라기보다는 어쩌면 외부공간에 일시적으로 형성된 작가의 유동적인 작업실의 내면 풍경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합해 보이기도 했다.
 
60년대 실험그룹들이 시도했던 전위음악이나 무의미를 나열하는 그런 형식의 퍼포먼스는 아마 다시 되살리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이날 정원에서 시도되었던 일종의 하이브리드적인 경계의 교차들은 아마 적합한 공간과 연결들이 만났을 때 창발적으로 발휘될 것 같다. 단발성의 이벤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전시나 퍼포먼스는 아카이빙과 네트워크로 계속 확장되어 진화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런 방식이 극복할 수 있는 개방적 잠재력은 적지 않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 이 방식은 지역성이라는 조건을 ‘제약’이 아니라 오히려 ‘자원’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힘을 갖는다. 장소의 고유함과 작가의 개별성이 만나는 지점에서 진정한 교감이 발생하고, 이는 관객에게도 감각적으로 전달된다. 그렇게 ‘지역성’은 감각 확장의 구심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번 기획에서 ‘정원’이라는 단어를, 아마도 물리적인 공간을 있는 그대로 지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리에서 이미지로, 텍스트에서 회화로, 행위에서 영상과 스마트폰으로 이어지는 감각과 매체의 교차 - 누구도 배재되지 않으면서 각자의 방식대로 공존하게 되는 만남의 연결점들. '정원'은 아마도 이러한 ‘관계망’들을 메타포로 아울러 냈으리라고 생각된다. 일상과 현장에서 뚜렷하게 공존하게 되는 장소특정적 맥락과 지역성을 함께 아울러 냈던 ‘각자의 정원’은 지역 예술계의 희미하지만 의미 있는 잠재력을 다시금 떠올려 보게 한 행사였다. 다양한 매체와 감각을 번역하며 행위의 다층적인 의미를 다양하게 해석가능하게 했던 작가 구성과 장소 친화적인 기획을 함께 아울러 냈던 기획자 유창희의 구성력도 함께 눈여겨보게 된다.
 
때맞춰서 멎은 비 덕택에 그날 5명의 작가에 의한 ‘각자의 정원’은 매우 인상적으로 진행되었다. 아방가르드가 소멸하는 시기에 우리는 또 다른 의미의 예술지평에 관해 떠올려 보게 된다. 그날의 정원처럼 지금 여기, 우리의 정원은 늘 햇살이 비치는 장소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아주 드물게 우리는 진부하지 않게 우리를 일깨우는 훌륭한 우연들도 만나게 된다. 그것이 예술적인 일깨움이다. 용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시선과 경험을 하나의 시간 속에 투영함으로써 분명히 정원이라는 하나의 연결점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을 칭하는 단어가 현재로선 달리 없기에 일단 예술이라는 공통분모로 유보해 놓을 뿐이다.



새로운 구상,
그리고 새로운 실험

글 : 조은비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새로움이라는 형태로 나아가기
예술을 통해 전시공간이 아닌 생활공간에 개입하고자 하는 구상 속에서 기획자 유창희는 《각자의 개변》을 통해 새로운 실험을 시작해 보았다. 사실 창작에 있어서 새로움의 등장은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구상으로 전시를 통해서 새로움을 추구해 보려는 기획자의 첫 시도는 새삼스럽게도 새롭고 또 소중하다.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을 통해 오늘날의 미술은 예배적 가치를 상실한 채 오로지 전시적 성격만을 갖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이후 아도르노는 우리가 과연 양심에 꺼리지 않고 서정시를 논할 수 있을지 질문하였고, 끔찍한 침묵 속에 등장했던 추상의 헤게모니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렇게 미술은 정치와 연결되었다. 현대예술은 예술을 통해 역사(혹은 운동)를 부정의 실천으로 읽어 내었다. 하지만 세상에 대한 새로움을 발언하는 태도는 결코 정치적인 예술로만 읽혀낼 수 없다. 그리고 이미 오늘날의 예술은 더 이상 부정의 힘으로만 작동되지 않는다. 이러한 점을 기획자는 새로운 실험을 통해 동시대 미술, 특히나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서 자신의 생각을 전시로 구현하고자 시도하였다.
오늘날의 한국 미술계에는 여전히 전통미술과 민중미술, 그리고 상업미술과 모더니즘이 서로를 견제하고 있다. 근대의 형성기에는 외세로부터 ‘미술’이라는 개념이 이식되었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산업화가 급진적으로 진행되면서 개념미술이, 70년대에는 서구의 모더니즘 미술을 모방하고자 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미술계에서는 어렵지 않게 다음과 같은 유형의 미술가들을 찾아낼 수 있다. 정치적인 미술가들, 전체주의를 거부하는 미술가들, 성적 차이에 관심을 가지는 미술가들, 그리고 주어진 관념을 전복시키려는 미술가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혹은 설상가상으로 자신의 위치를 입증하지 못한 지역작가들은 서로 다른 가치관으로 소여 된 미술계를 마주하게 된다. 동시대 예술, 특히 지역의 신진작가들이 구현하는 예술 작업에서 중요한 점은 주류의 흐름을 거부하고 순간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부터 새로운 예술은 다시금 시작될 수 있다는 부분일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학문과 달리 예술의 뛰어남은 과거의 위대함을 의심하거나 부정하는 과정에서부터 가시화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움이라는 가능성의 예술은 새로운 실험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흔들리지 않는 자기 확신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전시 《각자의 개변》은 공간과 사물, 현상들은 재정의 될 수 있고, 그 속에서 변화하는 속성을 서로 다른 장르를 통해 재발견하고자 기획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번 전시의 핵심은 관습화된 개념에 얽매이지 않고 전시공간에 드러난 가시성이 아닌 드러남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즉, 형태와 기능의 무한한 가변성)과 이들이 공유하는 예술적 토대(전시 구성)에 있었다. 즉, 유영하는 이미지와 흘러가는 사운드, 그리고 발화 행위를 숙고한 퍼포먼스 작업을 복기하며 창작자와 전시공간의 상호작용을 다시금 서술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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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열린 선율
TÆRI KIM와 SUN GIN의 음악이 두 시간 동안 연주되면서 여름 한낮의 한 광안리의 전시공간의 빛깔은 시시각각 달라졌다. 흘러가는 소리 위로 켜켜이 쌓여가는 열린 선율들이 비로소 한 공간에 만나면서 공간의 질감은 채워졌다. 두 사람이 이끌어내는 음악의 질감은 다소 상이했지만 연주자들의 움직임이 흡사했던 것이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까닥거리는 무릎과 선율들이 마주치는 레이어는 주름의 형태로 확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특히 디제잉 퍼포먼스 중에 가시화된 다층적인 선율은 수축과 이완의 과정을 반복하며 라이브를 들으러 온 관람객들의 움직임처럼 자연스럽게 흡수되었다. 전시 기간 내내 요리를 만들고, 주문된 식사를 먹으면서 사람들의 주고받은 대화 소리가 뒤섞이는 체험 속에서 이번 전시의 의미가 다시금 실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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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열린 이야기로써의 회화
작가 김등용은 전시공간 주변의 잔여물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일상에서 보이는 작은 행동들과 무의식적으로 지나친 사물을 예술로 관객이 재수용하는 것을 기대했다. 자신의 창작행위 이후의 관객의 반응이 수반되어야만 아이디어는 완벽히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작가는 행위에 유희적 요소를 부여하며 사물의 특성을 변화시키고자 했다. 이 과정 속에서 관람객들에게 특별한 설명을 강요하지 않았던 점이 작업에 공감과 설득력을 쥐여줄 수 있었다. 예술 유희는 창작실험을 통해 공간의 구조와 사물의 목적성을 변화시켰다. 나아가 작업에 사용된 청테이프는 또 다른 쓰임의 한 방편으로 전시에 활용되었다. 전시기획 중 가장 전시 공간과 흡사한 컨디션 속에서 제시되었던 작가 김은지의 작업은 유영하는 이미지의 모습으로 전시를 통해 표상화되었다. 평면의 회화작업과 영상이미지가 어떻게 한 공간 안에서 새로운 모양새를 가지는가에 대한 즉, 이미지를 통해 공간에 하나의 완결성을 부여하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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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비로소 자유로운 제스처
손한울 작가의 작업을 고통을 견디며 지속되는 수행행위로 갈무리하기에는 무언가 아쉬움이 짙다. 그는 글자만 남은 언어 ‘사랑해’와 이를 가시화 시킨 퍼포먼스 속에서 관객에게 질문을 던졌고 사랑의 본질과 수행성이라는 공통된 질문의 당위성은 꾸준히 쓰임이라는 작가 특유의 제스처를 통해 획득될 수 있었다. 사실 라이브 퍼포먼스 과정을 다시금 읽어낸다는 것은 실연 당시의 퍼포먼스를 보는 것에 대한 대안이 아닌, 퍼포먼스의 특성을 다시금 숙고하려는 기술(describe)의 노력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어떻게 작가의 제스처가 수행되었고 어떠한 순서로 작가는 퍼포먼스를 구성하였는가가 관람 당시에는 중요하게 다가왔다. 이 외에도 전시공간 지하에 마련되어 있던 공중에 떠 있는 의자는 중력을 거부함으로써 자유함을 얻었다. 그처럼 작가는 사랑해라는 언어에 수행성을 부여함으로써 사랑에 빠진 사람 고유의 소유하려는 마음보다는 사랑이라는 개방된 행위의 가능성과 타인에게 다가고자 움직이는 희망의 가능성에 관심을 마음을 기울이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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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마치며,
기록과 기억의 한계. 즉 기억에 의존해서 지나간 전시를 기록하는 것에 대한 막연함. 그리고 전시가 끝나고 더불어 전시에 대한 이 글이 끝나는 순간, 세계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이 전시의 의미는 비로소 우리 앞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 기대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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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명 : 각자의 개변
전시기간 : 2024. 7. 26. ~ 8. 4.
전시기획 : 유창희
참여 예술가 : 김등용, 김은지, 손한울, SUN GIN, TÆRI KIM
전시장소 : 복합문화공간 헬멧